2013년 5월 22일

사회 토론 보고서03#반별토론#소년범 처벌 강화해야 하나

사회토론 보고서03
<청소년 범죄자 처벌 강화해야 하나-반대 입장>
작성일 : 2013년 05월 15일, 21일
반별 토론(김재정 남광택 정재명 김다우) 보고서 작성 : 김다우

 먼저 확실히 해둘 것이 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청소년 범죄자에게 벌을 주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청소년 범죄자에게 죄질에 맞는 합당한 벌을 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벌을 주는 것에만 급급해서는 안 된다. 벌을 준다고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범죄는 진즉에 없어졌을 것이다. 벌을 준다고 모든 범죄가 예방된다면 그것은 단지 범죄로 인해 받을 벌이 무서워서이지 범죄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쳐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무작정 처벌을 늘리려 하기 보다는 어째서 범죄를 저질렀는지, 또 지금의 처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범죄를 미리 예방함과 동시에 이차, 삼차적인 범죄를 막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저 처벌을 강화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처벌을 강화한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처벌을 강화하고도 여전히 청소년 범죄가 발생한다면 더 강한 법을 만들어 청소년 범죄자에게 벌을 줄 것인가?
 그것은 매우 소모적인 일이며 그런다고 해서 범죄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실제로 지금까지 소년범죄에 대한 처벌은 강화되어왔지만 소년범죄가 줄어들기는커녕 해마다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의 청소년 범죄자에 대한 사후 관리는 매우 열악하다. 한국에는 보호관찰이라는 제도가 있다. 보호관찰제도는 소년범을 교도소에 수감하지 않고 가정과 사회로 돌려보내 지역에 있는 보호관찰관의 지도와 감독 속에 사회 활동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사회에 적응하게 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한 사람의 보호관찰관이 담당하는 청소년은 약 1백 20여명 정도이고 청소년 당 사회적응 교육을 받는 횟수도 한 달에 세 네번 꼴로 매우 낮다.

 청소년의 정의를 살펴보자. 청소년은 어른과 어린이의 중간단계로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며 때로는 그 감정들이 밖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신체적으로도 발달하여 이 시기가 지나면 성장은 점점 둔화한다. 보통 청소년은 만 13세부터 만 18사이의 사람을 지칭하는데, 이렇듯 정서·신체적으로 발달이 덜 되었을 뿐 아니라 보통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몇 배로 많기 때문에 과도한 법률로 그들의 죄를 처벌하는 것은 청소년에게 일말의 기회도 주지 않는, 무자비한 일이다.


 청소년은 교육을 받는다. 교육은 보통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등을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이다. 넓은 의미로는 ‘개인의 정신, 성격, 능력의 형성에 영향을 주는 모든 행위와 경험’을 교육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교육을 받고 있는 청소년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그 소년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변의 사회 환경이 소년이 범법행위를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사람과의 접촉 없이는 말을 배우지 못하고 다른 것들도 배우지 못한다. 그런데 소년이 범죄를 저지른 것이 단순히 소년만의 잘못이냐는 말이다. 소년이 어른 흉내를 내고 어른을 따라한다는 것은 그 소년이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소년이 처음 세상에 태어났다. 소년은 자라며 무엇인가 보았다. 소년은 어쩌면 혼자였다. 소년은 어쩌면 행복하지 못했다. 소년의 성적은 낮았다. 소년의 집안은 화목하지 못했다. …어떤 소년은 범죄를 저질렀다. 어떤 소년은 집을 뛰쳐나갔다. 소년은 붙잡혔다. 사회는 소년을 문제아라 불렀다. 소년은 소년원에 갔다. 어떤 소년은 보호관찰을 받았다. 사람들은 소년더러 손가락질 했다. 사람들은 소년에게 편견을 가졌다. 소년은 다시 범죄를 저질렀다.
 과연 소년의 범죄는 소년만의 잘못인가? 소년이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다른 사람들-특히 가족, 선생 등 소년을 돌봐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였나? 소년의 친구들은 소년을 말렸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이들더러 친구가 나쁜 짓을 하려 하면 제지하라고 배우지만, 이 세상의 어른들은 많은 나쁜 짓을 저지르고 그것을 눈감아 주기 때문이다. 소년의 잘못은 소년만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이러한 문제들-굳이 청소년 범죄가 아니더라도-에 대해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
 이것은 강한 벌을 준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강한 벌을 주어 해결될 문제라면 이 문제는 한참 전에 끝이 났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되고 있고 사람들은 벌만 주려 한다. 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벌을 주고 또 죄를 저질러서 벌을 강화시킨다면, 계속 그렇게 처벌을 강화한다면 처벌은 밑도 끝도 없이 강력해질 것이다.

 소년법은 “반사회성(反社會性)이 있는 소년의 환경 조정과 품행 교정(矯正)을 위한 보호처분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고, 형사처분에 관한 특별조치를 함으로써 소년이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률에서도 밝히듯이 소년법이란 범죄를 저지른 소년에게 벌을 주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청소년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이다. 이 제도의 의미를 흐리고 악용하여 벌주기 보다는 청소년 범죄자의 처벌을 강화하는 것에 급급하기 보다는 현재의 제도를 좀 더 제대로 시행하고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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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날 : 2013년 05월 15일(2반)/2013년 05월 22일(3반)


 오늘(22일) 토론 중 상대측에서 "그러면 당신 자녀가 죽임을 당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식의 질문을 했는데, 이렇게 대답했다.
 " (자녀가 없으므로)모르겠고, 만약 내가 죽임을 당하면 내 부모님이 너무 미워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힘든 일일거고, 내가 피해를 당했을 때 나는 내가 어떨지 잘 모르겠다. 두려워할 수도 있을 거고, 무섭고 힘들고 분노하고 증오하고 복수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사회를 원망하고 진저리치며 사회에서 살아갈 것이다. 내가 살아있다면.
 그래서 슬프다. 나는 이렇게 모순덩어리인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안학교는 국가가 실시하는 교육을 거부하는, 그런 학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거부한다기 보다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교육이 더 맞겠다. 그런데 국가에서-도에서, 시에서 공립으로 대안학교를 만들었다.
 사실 이 학교에 대안학교라는 수식을 붙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학교 설립주최가 국가(지방정부-교육청)이므로, 대안학교보다는 다른 호칭을 붙이거나 일반 학교에 다른 특색을 덧붙이는 게 나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 이 모순덩어리 학교에 다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충돌한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 충돌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서로의 생각을 안다. 좋은 거다. 듣는다는 거니까.
 여하튼, 이상한 세상은 오늘도 여전히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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